낙우조각회 소사

낙우조각회 소사(小史)

1. 낙우조각회 명명(命名)

낙우조각회가 창립되기 전까지 한국 조각계의 배경은 동경에서 공부한 소수 조각가들의 잠재력과 선전鮮展을 통하여 약간의 조각가 배출되었고,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 미술대학과 홍익대학이 1945, 1950년 각각 조소과彫塑科를 창설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국전國展이 10여회까지 진행되며 조각가를 배출하여 왔다.

당시 미술작품을 발표 할 장소가 고작 중앙공보관中央公報館의 4개실과 신문회관新聞會館 전시실이 서울의 전시회를 수용하는 큰 역할을 하였으니 조각전彫刻展은 간혹 선을 보였을 뿐이었다. 1958년 김영학, 1962년 김정숙, 1963년 6월 강은엽씨의 서울에서의 개인전과, 부산에서 김만술, 심봉섭, 광주에서 김찬식, 조제현씨의 개인전이 있었고 1959년 김종영씨의 이인전二人展이 낙우조각회 창립전 전까지의 전부이다. 그리고 조각단체전은 태동도 없었으니 한국 조각사상 여명기(국립 현대미술관 1974년 발행·한국현대미술사 <조각>에서는 이 시기를 전개기展開基라 했음)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현재와는 모든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시대였다.

낙우조각회 창립의 태동은 이러한 불모의 시점에서 1963년 5월에 본격화 되었으니 이는 체험을 구현하려는 학구적 청년조각가들에겐 새롭고 의욕에 찬 선구적 소명의식을 조형적造形的으로 발산하려 함이 역사적 필연성이었으리라. 따라서 창립전 계획은 비교적 순조롭고 원만히 추진되어 강정식, 김봉구, 송계상, 신석필, 황교영, 황택구로 회원 구성을 이루고 전시회장展示會場, 전시회기展示會期 및 팜프렛, 포스터 등 첫 경험을 체득하는 값진 기회가 되었다. 그런데 회합은 빈번하여도 회명會名이 결정되지 않아 끝내는 당시 박갑성 서울미대 학장과 김종영 교수를 찾아 뵙고 의욕과 집념, 신의와 결속 아래 순수조각단체純粹造刻團體를 창립할 취지를 정중히 입모아 설명하고 회명에 대한 지도 조언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서 『낙산駱山 밑에서 사귄 벗끼리 모인 조각회이니 낙우회駱友會라 함이 좋겠다』는 제의를 이의 없이 받아들여한국 최초의 조각단체인 낙우조각회駱友造刻會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낙駱"자는 낙산駱山(서울대학교 뒷산으로 서울대를 상징적으로 뜻함)의 첫 글자이며 또 의미하는 한자로서 낙타는 사막에서 대상隊商들에 의하여 떼지어 끝없이 넓고 황량한 사막을 걷는 인내력이 가장 큰 동물이다. 60년대초 한국의 조각계는 사막과도 같은 황무지였으니, 낙타와 같이 강한 인내력과 투지가 없다면 그 뜻을 펴 나갈 수가 없었던 형편으로 확신하였다. 따라서 서울대학의 긍지와 조각가로의 인내와 의지가 함축된 낙우회라는 회명은 만족한 명명命名이라 하겠다.

2. 낙우조각회 창립전

「본회는 조각예술造刻藝術 창작 활동에 있어서 그 의욕을 고취시키고 질적 향상을이룩하여 우리나라 조형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는 한편 회원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한다」고 회會의 목적을 천명하고 매년 1회 이상 작품발표회를 개최키로 하였다. 따라서 창립전은 원만히 이루어졌다.

1963. 7. 11~22 중앙공보관 제2전시실, 전시작품 점수點數 23점, 6명의 회원의 구상具象과 비구상非具象 작품(철조 8점, 목조 1점, 석조 1점, 석고조石膏彫 13점)으로 조촐하면서도 응집된 패기와 의지의 창립전을 개막하였고 많은 진실된 격려와 여러 신문이 크게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 및 전시평을 실어 주었다. 그 중 김영주씨는, 

"젊은 조각가 그룹으로 그 자체가 지니는 특이성 때문에 여러모로 주목을 끌었다. 조각가의 그룹으로선 처음인 점과 회장에 감도는 공간空間 정복에의 긴장된 분위기에 얽힌 「젊은 지성의 표현」이 문제가 된다.
물론 이 그룹전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의 예술성을 요구하는 일은 무리다. 그들의 연륜이 짧은 까닭이다. 더욱이 방법론에서 그들은 자신의 우상을 과감히 파괴해 나가야 한다. 선택한 자로서의 상반된 「에네르기」를 현대조각의 「시스템」에서 발산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새로운 상태로 향할 수 있는 소지素地를 지니고 있다. 요컨대 자전自傳에 맞서는 「젊은 지성의 표현」에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이다. 첫 출발에 축배를 들며 과열한 시련을 겪는 일과 철학을 예술 사회의 광장에서 체험하는 성장의 과정이 소중함을 말해 준다. 한편 오늘의 조각의 역할과 입장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 6명의 작품을 낱낱이 언급하였으며 작품 사진도 함께 게재하여준 수고에 감사했다. 더구나 자청하여 힘써준 것은 우리에게 가장 큰 격려 중의 하나로 기억된다. 내용이 호평이건 악평이건 솔직한 시평이면 만족하게 접수할 수 있는 순수한 우리의 자세였었다. 호好·불호不好간의 비평은 거두어져야 할 반응이었고 자체 회원들 스스로의 승전군勝戰軍 같은 반응 즉 반성도 매우 소중한 것이다.

3. 선언(宣言)과 활동상황

낙우조각회의 연혁에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듯이 1963년~1985년까지 23회 전시회, 4번의 야외전, 3번의 이미지전, 3번의 지방순회전을 개최하여 한국현대조각의 정착과 발전에 기여하여 왔다. 그리고 1966년 제3회1) 전에서는 낙우조각회 선언宣言을 처음으로 채택하였으니 우리의 이념과 방향이 확고히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선 언
1, 진실에 입각한 추상적抽象的 노력으로서 조형세계의 본질을 추궁追窮한다.
2, 공간과 입체와 재질材質에 새로운 추구로 조형의 전위적前衛的 경지를 개척한다."

1972년 제10회전을 옥내에서 「상황狀況」이미지전, 이어서 1973년 제11회전을 야외에서 「상황」이미지전으로 발표하며 선언과 주장을 채택하였다.

"
「상황전을 가지면서」(1972)

우리는 절박한 공간적 현실을 우리의 그릇에 담아 공간조형空間造形으로서 우리의 작품세계를 천명하려 한다.
무릇 깨어있는 자는 이러한 조형언어 앞에 필연적으로 서기를 원할 것이다.
조형전통의 얼은 현대의 확고한 조형이념으로 우리의 역량과 비전 앞에 살아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현실환경現實環境의 상황 속에서도 다시 한 번 깨어 있기를 다짐하며 우리의 작품으로 이를 확인하려 한다.
「상황 - '73」조각전을 가지면서
"무엇 때문에 작품을 하는가?" 묻는다면 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왜 그렇게 하고 싶은가?" 묻는다면 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중략)
아무리 숨가쁜 생활이지만 나는 문득 나무토막을 세워 나를 기억할 제단을 쌓을 충동에 사로잡히며 끝없는 장대를 세워 나의 도전과 소망을 공간에 띄워 볼 욕망을 갖는다. 발끝에 닿는 돌맹이나 쇠붙이 때문에 갑자기 되살아나는 나 자신의 모습, 그리고 나를 잊은 채 며칠씩 생존하고 투쟁하는 질 뿐인 삶, 그러나 손끝 하나만 다쳐도 통증을 느끼는 나, 나는 나를 찾아야 한다. 나는 대체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이러고 있는가! (중략)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도 많고 버려야 할 것도 많다. 좋은 것도 많고 가져야 할 것도많다. 알아야 할 사람도 많고 아껴야 할 물건도 많다. 알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도 많다. 그러나 나는 주고 싶은 것, 보이고 싶은 것, 만들고 싶은 것, 남기고 싶은 것도 많다. 그래서 나는 역사의 창조에 참여하는 사명을 공간, - 삶을 위한새로운 공간의 창조에서 다 하려 한다.
"

"
「빛 - 空」의 표현表現에 부쳐(1985)
낙우조각회는 금번 「빛 - 空」의 테마전을 펼쳐보입니다.
돌이켜보건데 그동안 한 시대정신時代精神의 반영으로써 「상황」이란 표제전을 시도했던 것이 70년대 초였습니다.
이제 오늘의 표제는 그보다 더 긴 시간에 파장을 맞춘 본질적인 근원에 뿌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의 개념은 다분히 초지역적超地域的이긴 하나 동양의 정신적 배경에 가까우며 우리가 살아 왔던 호흡呼吸과 의식에 무연히 녹아있는 바탕이라 생각됩니다.
빛은 물리적인 대상이기 보다는 생명을 가진 자의 한 정신적 근원의 표상이며 공은공간의 개념을 내포하면서도 그 이상의「비어있음」에 대한 표상입니다.
「비어있음」은 「차있음」보다 상위며, 차 있는 것의 가장 근원은 비어 있는 것입니다. 비어 있는 곳에 빛은 있으며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며 생명과 가시적 내지 촉지적 형상의 세계가 건립된 것입니다.
동양의 공사상은 서구의 새로운 조명을 받아 현대문화의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빛 - 공」의 표제는 일견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이며 광범위한 해석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간적, 공간적 시점에서 한번쯤 우리의 근원에 자리하고 있던 개념을 대상으로 작품화해 본다는 것은 어려운 가운데 의미있고 뜻 깊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후략)
"

낙우조각회 출범이후 23회전까지 진행되는 동안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85년 말 현재 작고作古회원 2, 재가在可2)회원 2, 탈퇴회원 8명이며 현 재적在籍회원은 38명이다. 낙우조각회에서 활동하다가 탈퇴한 회원 중엔 신생 조각 그룹 형성의 주역들이 되었고,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함은 매우 만족히 생각하는 바다.
그리고 ‘85년말 현재 현회원 개인전 현황 <표2>을 보면 38명 현회원중 15명이 개인전을 통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고히 하였으며 해를 거듭함에 따라 더욱 활기찬 작품 창작 활동상을 진지하게 보여 주고 있음은 주시하여야 할 일이라 하겠다.
현대 사회 정세는 아침과 저녁 사이가 다를 정도로 급변하고 있는 특수성 앞에 작가作家로서 생존적 본능은 관망만을 허용치 않는다. 매일같이 무수한 전시장은 대중의 관심 밖에서 수다한 전시회가 열리고 곳곳마다 환경조형물環景造形物이 위치하는 실정에 직면하고 있다. <표3>에서 보여주듯이 순수조각단체가 우후죽순격으로 해마다 출생하여 4년 이상 된 그룹만도 20개 단체가 넘고 그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형성 또는 활동하고 있는 바다. 그룹다마의 성격도 각양각색이지만 각 그룹에 참여한 모든 조각가에게 요청되는 것이 있다면 한국조각사 창조의 주역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 최선을 다하여 충실하고 밀도와 차원 높은 조각 예술 작품을 제작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60년대초의 한국조각이 재료의 확대 또는 개발은 목재, 석재, 철재, 석고재 등 제한성에서 점진적으로 철조, 합성수지, 유리, 아크릴… 등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 미숙했던 수법에서 재료 정복 또는 극복력을 신장시켜 오늘날 조형공간의 합리적 배려와 구사능력을 지니고 미의식美意識과 사상, 감정을 무리없이 표출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작가군 형성도 빈약했고 조각가 지망자에게 이렇다할만한 조각작품 발표마저 보여주지 못하였던 시대의 어려움을 딛고 횃불을 높이 들었던 낙우조각회는 연륜을 쌓으며 한국 현대조각의 정착과 발전의 시기를 단축시키는데 가장 큰 공헌을 세웠다.

4. 이후(以後)의 관점

한 시대의 자전적 세계와 한국 조각계의 중심적 주역의 사명을 다 하며 성장 발전하여 온 본회本會는 신앙과 자아, 이미지의 선구적 구사와 차분한 전진으로 20세기 한국 조각 역사를 확정하는데 막중한 임무를 짊어져야 한다.
끝으로 본회의 성격은 동문의 모임이 아니라 순수조가 창작 단체로서 80년도부터 성과 출신교를 초월하는 문호를 개방하였으며 앞으로 좀더 높은 차원에서 합리적 회원 구성을 도모하고 있다.
낙우조각회는 창립시 낙우회駱友會라 명명하여 최근까지 왔고 1984년도부터 낙우조각회駱友造刻會라 개칭하였는데 이는 많은 미술단체의 창설創設로 인하여 조각회造刻會의 명시明示를 위함이다.

                    - 황교영 (1985)